내 안에 악마 죽이기

얼마전에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나 또한 간접적으로 연이 있었고, 미국 청년들 사이에서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인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유타 대학교에서 평소처럼 학생들과 논쟁을 하다가 총을 맞아서 죽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대학생 시절에 찰리 커크를 실제로 만났었고, 악수도 해봤던 입장에서 그런 인물이 자연사도 아닌 암살을 당했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SNS에서 찰리 커크의 죽음을 축하하고, 그의 죽음에 엄청난 행복을 느끼는 듯한 영상들이 있었다. 아무리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를 혐오한다고 해도 사람이 죽은 일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축하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에서 너무 충격을 받았다. 사실상 사람의 탈을 쓴 악마가 아닌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한탄을 하던 와중에, "그럼 나는 어떤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게 됐다.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봤다.
"찰리 커크의 죽음에 기뻐하던 사람들은, 정말로 찰리 커크가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가 잘 나가고 유명하고, 권력도 막강한데 그런 사람이 큰 불행을 당한 것이 좋아서일까?"
둘 다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후자의 감정은 나 또한 느끼는 감정이기에.

'르상티망'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오래된 단어지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이 단어를 쓴 것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이 단어를 설명하고 나서 부터다.
르상티망이란,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시기심을 이야기 한다. 그 시기심은 다양한 경로로 배출되는데, "강자가 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약자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야말로 사실은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것이 아닌, 옳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는 자기위로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강자가 실수를 하거나 큰 실패를 하거나 하면 자신들의 르상티망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찰리 커크의 죽음을 축하하고, 그의 죽음에 행복해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심리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현 행정부에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30대의 젊은 정치 운동가가 죽은 이유는 그가 옳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합리화. 그리고 그게 옳다는 의식.
굳이 죽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예시는 굳이 찰리 커크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오타니 쇼헤이 조차도 악플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오타니가 50-50을 달성한 것은 운이었다느니, 오타니가 한 경기라도 못하면 "팀에 도움이 안된다."느니. 사람들은 어떻게든 오타니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 이유는 오타니가 전무후무한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강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혐오는 다른 야구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못하면 그들에게 온갖 치욕스러운 별명을 붙히고 그들을 깎아내리기 바쁘다.
백종원 사태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백종원이 잘 한 것은 없지만, 백종원에 대한 혐오심이 증폭된데엔 그가 여태까지 이 사회에서 "강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백종원이 구설수에 올라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사람들은 신나서 그를 더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려 한다. 그게 "즐거우니까"
사람은 그러한 존재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가?
블록체인 시장에 있다보면, 정말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들이 여럿있다. 나 또한 잠깐이지만 큰 돈을 벌어봤고. 문제는 내 주변 지인들이 갑자기 큰 부를 얻었을 때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말로는 "진심으로 축하한다." 또는 "내가 더 기쁘다."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서 이야기 해보면, 물론 그런 마음도 있었겠지만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그들에 대한 시기, 질투, 그리고 그들이 잘 안됐으면 하는 마음들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이 부를 일궈낸 과정이 "운이었을 것이다." "뽀록이었을 것이다."라며 내가 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도 있을 것이다.
블록체인, 크립토가 유난히 더 힘든 업계인 이유는, 이러한 비교를 끊임없이 하고, 매일마다 상대적 박탈감과, 상대방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어느정도는 느끼면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시작한 누군가가 이제는 나보다 열배, 백배 부자라면 너무나도 부럽고 시기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돈 벌었다고 꺼드럭" 대는 것이 위험한 이유도 바로 그거다. 자랑하는 거 자체는 크게 상관이 없는데, 돈을 벌었다고 알리는 순간 그 사람은 이 업계에서 "강자"의 포지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벌고 있을 때는 모두가 그 사람을 찬양하지만, 한 번 삐끗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서 추락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계속 이야기 하지만 나 또한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나 또한 마음속 깊숙한 곳엔 누군가의 불행이 꼬숩고, 누군가의 성공이 배아파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들을 잘 다듬고 잘 컨트롤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불행한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주적인 삶을 살자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속에서 스스로 자유를 빼앗기고 객체화되는 상황이 지옥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 말을 좀 더 확장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행복에 배아프고,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삶을 살고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타인은 지옥이다." 일 것이다.
타인의 불행, 타인의 행복. 그런 것들에 집중하지 말고, 오직 나의 행복과 나의 삶에 집중하자.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는 것 만큼이나, 타인의 상태를 내 기분의 주체로 만드는 것도 지옥이다. 이제 그만 지옥에서 나오자.
이 글의 마지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인 캘빈 쿨리지의 말로 끝내고 싶다.

"약자가 강자를 끌어내림으로써, 약자가 강해지지 않는다."
-캘빈 쿨리지 (30대 대통령)-
내 안에 악마를 죽이자.